2025-01-08 새벽 기도회 말씀
에베소서 2장 19-22절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찬송가 23장 / 521장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거의 3년 동안 머무르면서 복음에 대해 선포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머문 시기가 긴 만큼 바울은 많은 것을 가르칠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에베소 교회에 쓴 에베소서는 안에 담겨있는 신학의 수준이 높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에베소서를 ‘신약의 알프스’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먼저 에베소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긴장감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오래 가르친 만큼 에베소 교회 안에는 ‘내가 쟤보다 나아’라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은 이 두 번째 문제인 ‘내가 쟤보다 나아’라는 교만에 대해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은 19절에서 ‘이제부터 너희는 동일한 성도이자 하나님의 권속이다’라고 말합니다.
2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를 잇는 모퉁잇돌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이어서 21절에 ‘그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의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 남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과 ‘내가 다 안다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이 두가지 외에 선택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아무것도 모르니 난 못합니다’라고 손들고 말아버리는 무지렁이가 주님을 만나면, ‘아무것도 모르지만 주님을 믿고 다시 일어나보겠습니다’로 바뀝니다.
또한 ‘나만이 다 안다’라고 교만하게 올라간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 ‘나는 겨우 이정도 알 뿐이지만, 주님께서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더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십니다’라고 겸손하게 바뀝니다.
아쉽게도 에베소 교회에는 ‘나만이 다 알고 있다’는 교만한 사람이 많이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시끌벅적했던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편지를 쓰십니다.
그리고 21절 말씀과 같이 ‘주님이 너희를 연결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22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저는 ‘너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는 이 말씀이 너무 귀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며 동시에 노사연씨의 ‘바램’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사실 찬양말고는 잘 듣지 않아서 특히나 옛날 노래를 많이 알지 못하는데, 이 노래는 가사가 참 마음에 와닿아서 기억하고 있는 곡입니다.
이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구원의 여정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쉽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린 예수님의 이미 구원받았지만, 동시에 아직 구원 받고있는 중입니다.’
구원은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것을 믿는 동시에 그 즉시 발생합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그때부터 구원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원의 여정에서 조금 앞에 있다고, ‘나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교수님들이 이렇게 말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의 설교나 신학이 마음에 안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에도 부족해보일것이고 때론 틀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은 모두 어렵던 시절 최선을 다했던 분들이고, 그분들 덕분에 오늘까지 신학이 발전할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그렇구나’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도 믿음의 선배가 있고, 믿음의 후배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믿음의 연차가 있다고 다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훌륭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라도 힘겨운 시기에 믿음을 지켜주신 선배들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 한우리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배로써 선배들을 볼때는 ‘저 선배 덕분에 우리 교회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다음세대들에게 그것이 옳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선배로써 부족해보일 수 있는 후배의 모습이 보이더라도 ‘손가락질과 훈계’보다는 사랑으로 안아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시간이 필요하더라구요.
이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어져가는 존귀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저 사람도 그리고 나도 함께 지어져간다’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사랑과 겸손으로 서로를 품는 우리 한우리교회, 그리고 한국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5-01-08 새벽 기도회 말씀
에베소서 2장 19-22절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찬송가 23장 / 521장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거의 3년 동안 머무르면서 복음에 대해 선포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머문 시기가 긴 만큼 바울은 많은 것을 가르칠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에베소 교회에 쓴 에베소서는 안에 담겨있는 신학의 수준이 높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에베소서를 ‘신약의 알프스’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먼저 에베소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긴장감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오래 가르친 만큼 에베소 교회 안에는 ‘내가 쟤보다 나아’라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은 이 두 번째 문제인 ‘내가 쟤보다 나아’라는 교만에 대해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은 19절에서 ‘이제부터 너희는 동일한 성도이자 하나님의 권속이다’라고 말합니다.
2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를 잇는 모퉁잇돌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이어서 21절에 ‘그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의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 남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과 ‘내가 다 안다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이 두가지 외에 선택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아무것도 모르니 난 못합니다’라고 손들고 말아버리는 무지렁이가 주님을 만나면, ‘아무것도 모르지만 주님을 믿고 다시 일어나보겠습니다’로 바뀝니다.
또한 ‘나만이 다 안다’라고 교만하게 올라간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 ‘나는 겨우 이정도 알 뿐이지만, 주님께서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더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십니다’라고 겸손하게 바뀝니다.
아쉽게도 에베소 교회에는 ‘나만이 다 알고 있다’는 교만한 사람이 많이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시끌벅적했던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편지를 쓰십니다.
그리고 21절 말씀과 같이 ‘주님이 너희를 연결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22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저는 ‘너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는 이 말씀이 너무 귀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며 동시에 노사연씨의 ‘바램’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사실 찬양말고는 잘 듣지 않아서 특히나 옛날 노래를 많이 알지 못하는데, 이 노래는 가사가 참 마음에 와닿아서 기억하고 있는 곡입니다.
이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구원의 여정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쉽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린 예수님의 이미 구원받았지만, 동시에 아직 구원 받고있는 중입니다.’
구원은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것을 믿는 동시에 그 즉시 발생합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그때부터 구원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원의 여정에서 조금 앞에 있다고, ‘나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교수님들이 이렇게 말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의 설교나 신학이 마음에 안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에도 부족해보일것이고 때론 틀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은 모두 어렵던 시절 최선을 다했던 분들이고, 그분들 덕분에 오늘까지 신학이 발전할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그렇구나’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도 믿음의 선배가 있고, 믿음의 후배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믿음의 연차가 있다고 다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훌륭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라도 힘겨운 시기에 믿음을 지켜주신 선배들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 한우리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배로써 선배들을 볼때는 ‘저 선배 덕분에 우리 교회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다음세대들에게 그것이 옳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선배로써 부족해보일 수 있는 후배의 모습이 보이더라도 ‘손가락질과 훈계’보다는 사랑으로 안아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시간이 필요하더라구요.
이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어져가는 존귀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저 사람도 그리고 나도 함께 지어져간다’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사랑과 겸손으로 서로를 품는 우리 한우리교회, 그리고 한국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